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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지, 패션 Passion

wgmg 2018. 4. 29. 00:00

Passion (2006)
★★★★★
일레이 리그로우 × 정태의



퇴역군인 정태의는 앞으로의 미래를 고민하던 중입니다. 평생 말뚝박을거라 여겼던 군에서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심난한 와중에, 하나뿐인-유별난 천재이자 유별난 행운을 가진-그의 쌍둥이 형은 불운을 겪어보겠다며 인연의 실을 끊는 시늉을 하더니 그날로 집을 나갔습니다. 형의 행동도 황당하지만 당장 닥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던 그에게 누군가가 방문합니다. 3년만에 만난 하나뿐인 숙부는 대뜸 그의 직장 UNHRDO(인적자원 양성을 위한 국제기구)에서 반년만 도움이 되어달라 청합니다. 어쩐지 별로 내키지 않아 정태의는 거듭 사양합니다만, 그가 숙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거란건 스스로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홍콩 근처 외딴 섬에서 정태의의 인생 2막이 시작됩니다. 군인생활을 경험한 그에게 UNHRDO생활은 특별히 어렵지는 않아요. 험한 훈련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첫눈에 반한 예쁜 미청년도 어쩐지 정태의에게 호의적이라 위로가 됩니다. 그럭저럭 생활에 적응해가던 어느 날. 연례행사인 다른 지부와의 합동훈련이 코앞으로 다가옵니다. 그 해에는 하필 아시아지부와 유난히 사이가 좋지 않은 유럽지부와의 훈련이 예정된 가운데, 특히 그중에서 UNHRDO 공공의 적이라고 할 만한 미치광이 살인마- 리그로우, 릭이라는 남자를 모두가 두려워하고 증오한다는걸 알게됩니다. 악명이 워낙 자자해 죽은듯이 지내야겠다 생각한 정태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는 당일부터 미치광이 릭과 얽히고맙니다.


작가님은 패션이라는 제목을 수난곡에서 따오셨다고 해요. 제목 그대로 정태의 수난곡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태의는 험하게 구릅니다. 미친놈에게 찍히고, 동료들과 멀어지고, 마음은 심난하고, 몸은 성한데가 없고, 가족이라고는 모든 일의 원흉이고. 그를 둘러싼 상황은 분명 흉흉하기 그지없는데 정태의는 무덤덤한 성격으로 한숨이나 쉬면서 그럭저럭 넘겨버리고 맙니다. 그게 참 매력있어요. 이기적인 인간들 투성이인 이 세계관 내에서 유일하게 정태의는 인간적입니다. 지나치게 착하다거나 오지랖을 부린다는 이야기가 아녜요. 그것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드러납니다. 이를테면 누군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돕는다거나, 가족을 소중하게 여긴다거나, 누군가의 불행에 공감할 줄 아는 마음, 이런 것들입니다. 사소하고 작은 그 소소한 것들은 정태의를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보이게 해줍니다. 지독히 이기적인 주변인물들 사이에서 그의 인간적이고 상냥한 면모는 돋보입니다.


일레이 리그로우는 완전 미친놈입니다. 두말할 나위가 없어요. 사실 공공기관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게 흔한일이 아니죠. UNHRDO는 군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일레이는 미친듯이 사람을 죽입니다. 솔직히 저는 목숨을 거는 동료애라는 설정에 크게 공감이 안가서그런지 왜 다들 그렇게 일레이를 죽이려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저놈을 죽이고 싶다와 저놈을 지금 당장 죽여버리겠다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잖아요? 전쟁중인 것도 아니고, 직업이 엄한것도 아니고, 피해자의 유가족이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는 덤벼드는 인간들을 족족 때려눕히거나 때려죽입니다. 읽다보면 오싹할만큼 죽이는 묘사가 자주 나오는데 왜 광공하면 일레이고 일레이하면 광공인지 금방 아실거예요. 그래도 이 미친놈이 엄청 매력적이더라고요.









네가 어느 지저분한 골목에서 불시에 칼을 맞고 쓰러졌는데 구해주는 사람도 하나 없어 그대로 죽어버린다면, 나만은 슬퍼해줄게.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넌 걱정할 것 없어. 네가 내 거라고 인식하는건, 네가 아니라 나라니까.








재미있는건 일레이는 잘생기고 말끔한, 호감가는 인상으로 묘사되고 정태의는 그냥 평범한 청년으로 묘사된다는 것입니다.(하지만 정태의는 시리즈를 읽다보면 거의 마성의 게이입니다) 사실 패션 본편에서 주요인물들 가운데 가장 외형이 도드라지게 묘사되는건 신루예요. 초반에 정태의가 한눈에 반할만큼 사탕과자같이 생긴 녀석인데 저는 이 캐릭터는 책을 읽는 내내 거슬리더군요. 얘를 왜 넣으셨을까 궁금할정도로 이물질 이외에는 의미가 없어요. 왜 일레이를 싫어하는지도 모르겠고 정태의가 그래도 첫눈에 반했다고 계속 마음쓰는게 짜증도 나고. 도무지 마음이 안가서 신루 외전인 raga는 건드리지도 않게 되더군요.


신루가 그럭저럭 거슬리는 유형이라면 인간적으로 싫은 인물은 단연 정재의와 정창인입니다. 둘다 지독히 이기적이에요. 정창인은 다정한척하며 사람이든 사물이든 이용에 서슴지않고, 정재의는 자신의 연구결과에 책임을 질 줄 모릅니다. 그만한 천재가 왜 저렇게 그의 연구가 주위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모를까 싶을만큼 머저리같이 굴어요. 본편 외에도 시리즈 끝까지 가면 거의 혐오스럽게 싫어지더군요. 라만과 정재의의 외전을 바라는 분도 많은걸로 알고 있는데 저는 아무래도 영 정이 안가요. 그래도 유우지님의 새로운 글 보고싶어요...


총 여섯권 가운데 마지막 5,6 권은 좀 늘어진다 싶기도 해요. 솔직히 마지막에 신루가 등장하는건 뭐랄까, 세번째는 안된다는 일레이의 대사를 위해 욱여넣은게 아닌가 싶을정도로 황당했어요. 그래도 전체 17권이나 되는 시리즈의 본편인만큼 아주 재밌습니다. 안읽어보셨다면 한번쯤 읽어보시는걸 추천해요.







일레이는 울다 지쳐 늘어져버린 정태의의 목이며 귀, 뺨, 얼굴, 입술이 닿는 곳마다 샅샅이 핥아올리며 입을 맞추었다. 마치 한군데라도 닿지 않는 곳이 있어선 안 된다는 듯이, 집요하게.
"잘 기억해, 태이. 오늘부터---이제부터는 매일, 너는 내 거다."
상냥하고 달콤한 속삭임이 보드랍게 뺨을 핥아올렸다.
정태의는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욕할 기운도 다 사라진 머릿속으로 한탄했다.
이 미친놈. 이게 뭐가 '네가 인식하는게 아니라 내가 인식'이야. 이러면 결국 내가 세뇌되는 거 아냐. 이 빌어먹을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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