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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

유우지, 부시통

wgmg 2018. 4. 29. 05:30

부시통 (2015)
★★★☆
카이언 × 아이삭 라파우드



아이삭은 왕궁에서 근무하는 근위병입니다. 언젠가 예쁜 집에서 예쁜 닭을 키우며 예쁜 연인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소한 꿈을 가지고 있지요. 적당히 평범하게 살아가는 아이삭에게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 하나 있는데, 그가 바로 마녀의 혼혈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세상에서 마녀들은 대개 마녀사냥을 당해 죽거나 달조각 배를 타고 그믐의 나라로 떠났지만 혼혈인 아이삭은 배를 타지 못해 어머니를 보내고 홀로 남았습니다. 어린 소년이 혼자 살아남기에 세상은 녹록지 않았지만 아이삭은 썩 괜찮은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그렇게 출생의 비밀을 감추고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날. 그에게 고양이 세마리가 들러붙습니다. 아이삭에게 대뜸 부싯돌을 툭 내민 고양이들은 왕궁 보물창고에 있는 자신들의 보물인 부시통을 찾아내라 아이삭을 닥달합니다. 평온하고 온건한 삶을 살길 바라는 아이삭은 단칼에 그것을 거절합니다만, 그믐날마다 소원을 세개씩 들어준다는 이야기에 솔깃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과의 하룻밤을 덥석 소원으로 빌고 말아요. 그리고 거기서부터 아이삭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생각해보면 부시통은 얼굴 밝히다가 신세망친 이야기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싶어지네요.


유우지님이 쓰신 짝사랑물 중에서도 아이삭은 정말 지고지순하기로는 첫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어요. 아이삭이 하는걸 보면 이 바보야, 이 얼굴밝히는 바보야, 라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고양이들이 아이삭을 만방이-만사에 아방한-라고 부르는게 십분 이해가 되어요. 제 취향에서 수는 어느정도 구르는게 좋지만 얘는 정말 각별합니다. 피폐물이라 공이 굴리는것도 아니고 지가 굴러요. 심장을 찌르고 저주에 물리고 칼에 꽂히고 물에 빠지고 가지가지 합니다. 왕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죽기 직전에 더 확실히 죽을 짓을 하기도 하고요. 안쓰러울 만큼 열심인데 왕자는 알아주기는커녕 피나 빨아먹고 생기나 퍼부어줍니다.



.


달아. 어째서 이렇게 달지.
ㅡ 달아, 어쩌면 이렇게 달지.


.


그렇다면, 내가 허락지 않는 한 마녀의 행위는 하지 마라. 무엇이든,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도. 절대로.


.



아이삭이 왕자에게 눈길을 준 이유는 화려한 걸 좋아하는 마녀의 특성상 그의 취향에 부합하는 화려하고 완벽한 외모를 왕자가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꺼풀을 뒤집어 쓴 인간 아닌 자,라는 신탁을 받은 왕자는 그 말 그대로 성장했습니다. 날 때부터 울지도 웃지도 않은 아이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마물들이 들끓는 변경으로 떠났고, 그대로 마물들을 토벌시키고 청년이 되어 돌아옵니다. 나라의 영웅이지만 왕궁의 자들에게 그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바쳐진 감정은 오로지 경외뿐이어서, 아이삭은 점차 왕자도 인간들로부터 유리된 삶을 살아온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외모나 성격이나 비범함이 인간같지 않기도 하고요. 아이삭은 오로지 혼자 살아가는 그가 영 안쓰럽고 마음이 시립니다.


왕자-카이언은 왕가에 내려진 저주를 끊어 그믐날 받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세상에서 마녀가 모두 없어져야 하지요. 일은 차근차근 진행되어가고 왕자는 실패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습니다. 헌데, 자꾸만 그는 호위로 붙인 마녀에게 이제껏 그를 이끌어온 마녀에 대한 증오보다 한층 더 격렬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저주를 풀기 위해선 아이삭을 죽이거나 그믐의 나라로 떠나보내야 합니다. 카이언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습니다.


삽질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인데 아이삭이 퍽 애처로워서일까요. 답답하다기보다는 도망가 아이삭!... 이랄지. 고양이의 마음이 독자의 마음 아닐까 싶어요. 애초에 아이삭이 그믐의 나라로 떠나기로 결심을 굳힌 이유도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자가 조금이라도 증오의 감정에서 벗어나 편한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서입니다. 아이삭은 그냥 답이 없어요... 왕자도 둔하기 짝이 없는건 매한가지라 너도 참 어지간히 하는구나 혀를 차게 됩니다. 그래도 유우지님의 짝사랑물은 실망하는 법이 없어서, 손에 쥐면 홀린 듯 읽게 되지요. 감초 역할을 하는 고양이 삼형제가 만방이 (화)수분이 하는 것도 재미있고요.



.


"......이라고 해주시면 좋을 텐데요."
애정이라고 해준다면. 저도 모르게 입속으로 중얼거린 말이 바람소리처럼 새어나왔다.


.


그제야 아이삭도 마음편히 왕자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문득 조금 서글퍼지는 것이다.
내가 마녀가 아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러면 순순히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분이 어쩌면 자신을 조금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 단단히 끌어안는 팔 안에서 헛되나마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분이 그토록 증오하는 마녀가 아니었더라면.
부시통을 찾아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불현듯 그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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