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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Step From Hell (2015)
★★★★☆
헤수스 밀러(레이븐) × 다니엘 바튼(김재희)



아이는 쫓기고 있습니다. 고아원 원장의 성적인 학대를 피해 가위를 허벅지에 찔러넣고 어두운 숲으로 도망쳤지요. 등 뒤에서 거구의 남자가 도끼를 들고 쫓아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신을 찾지 않는 아이에게 악마가 손을 내밉니다.


악마는 달콤하게 아이를 유혹해 세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그와의 계약을 요구합니다. 첫번째 소원은 당연히 원장을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소원으로 아이는 악마의 이름에 관한 힌트를 청합니다. 퍽 귀찮아 보였던 악마는 단 한번의 기회를 주었고 아이는 악마의 노란 눈을 마주보며 홀린듯이 그 이름을 입에 올립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아이는 악마에게서 도망칠 수 있습니다.



.


언제든.
네가 어디에 숨어 있더라도.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찾아내 혀를 자르고 입을 찢어 놓겠다.
내 이름은커녕 살려달라는 말조차 뱉지 못하게.
안심하지 마라. 마음놓지 마. 어떤 순간에도, 어떤 곳에서도,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계속 경계하고 생각해.
기억하렴. 네가 가장 안락하고 행복한 순간에.
나는 죽음과 함께 널 찾아갈 테니.


.



다니엘은 아주아주 예민한 성격입니다. 악마에게서 도망친지 이십년이 흘렀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에 죽음과 함께 찾아오겠다는 그 위협은 언제나 그와 함께 있습니다. 길가다 시비가 붙은 사람이 밤길 조심하래도 찝찝할 마당에 인간이 아닌 존재가 섬뜩하게 울부짖으며 뱉은 말은 더할나위 없이 효과적이겠지요. 다니엘은 이름을 내뱉던 순간 끔찍하게 일그러지던 악마의 얼굴을 한번도 잊은적이 없습니다. 악마를 다시 만난다면 당연히 찢겨죽을거라 생각한 그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고 누구의 마음도 받아준 적이 없습니다. 따뜻한 양부모와 형제에게서 애정을 받고 자랐고, 하버드 로스쿨을 나와 유명한 로펌에 다녔고, 그리고 지금은 숨겨진 기구인 이종족 관리국에서 꽤 높은 연봉을 받으며 근무하지만, 다니엘은 단 한번도 행복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악마와의 재회는 무척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영부인 에바 테일러가 악마와의 삼중계약을 맺고 피살된 사건을 조율하기 위해 다니엘은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잠시 옮겨오게 됩니다. 본사에서 마련해준 호텔 로비에서 택시를 기다리다 얼핏 눈이 마주친 모델같은 남자가 이십년 전 그 악마라니 평범해도 이렇게 평범한 만남일수가 없습니다. 온갖 끔찍한 재회를 염두에 두었던 다니엘은 맥이 빠질 지경이지만 정신은 날카롭게 날이 섭니다. 어떻게든 그를 떼어내야 하지만 어쩐지 악마는 다니엘에게 관심을 보이고, 다니엘은 그를 알아가며 그가 가진 외로움에 연민을 느낍니다. 악마에게 줄 감정은 증오뿐이어야 하는데. 자꾸 엇나간 마음을 갖는 스스로가 짜증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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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보다는 무척-... 무척 외로운 기분이었지.


.


있죠, 도망가면 쫓아가고 싶다는, 그런 기분 압니까?
저는 그보단 누가 쫓아오면 도망가고 싶어지는 타입이라서요.


.


소원을 말해. 내가 널 가질 수 있게.


.



악마-레이븐은 작은 계집아이에게 이름을 빼앗긴 순간을 한시도 잊지 못합니다. 태초부터 살아온 어둠인 그는 그 오랜 시간 혼자였다는 것을 계집아이가 이름을 부른 순간 깨닫습니다. 그건 어떤 감각일까요. 그 순간 치밀어오르는 지독한 외로움이 얼마나 고통스럽던지. 계집아이를 당장 잡아죽이려던 레이븐은 아이가 연달아 외치는 그의 이름에 차마 아이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19년간 마계에서 분풀이를 하다가 레이븐은 지상으로 올라옵니다. 일년간 아이를 찾아봤지만 그다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던 어느날. 비오는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양인에게 드물게 관심이 갑니다. 그 계집애가 남자로 자랐으면 딱 이렇게 컸으리라는 흥미로운 생각을 할 정도로요.



.


계속해 너를 생각하다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너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너를 죽이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너를 보고 싶었던 거더군.


.


다니엘은 가만히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란다를 보며 씁쓸한 혀끝을 느꼈다. 억누르고 억눌러도 터져나오는 그녀의 외로움이 피부에 닿았다. 세상에 둘 뿐이라는 감각이 무서워 상대를 죽인 뒤, 그리고 그 세상에 혼자 남은 감각이라니.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버석거리는 것 같았다.


.



장량님 작품 중에 가장 좋아하는 글입니다. 장량님은 여러 인기작-알로샤의 꽃, 다정다감, 세이예스..등-을 내셨지만 저는 킬더라 빼고는 장량님과 영 안맞더라고요. 안맞는다는 일종의 편견때문에 제가 원스텝을 안봤다면 정말 우울했을겁니다.


이 글에서 악마에 대한 설정은 어딘지 인간적입니다.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으로 외로움을 알게되고 충족감을 느낀다는게 참 로맨틱하지 않나요? 원스텝의 악마들은 제각기 악마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정신적으로는 너무나 허약하기 이를데 없어요. 레이븐이 마왕답지 않게 좀 더 잔인하지 못했던것도 그에겐 그의 이름을 불러줄 김재희가 절대자였기 때문이지요. 세상에서 서로의 진짜 이름을 단 둘이서만 부르는 사이라니 상상도 못할만큼 간지러울거예요.


다니엘의 한없이 비틀린 성격이 마음에 듭니다. 남을 상처입히면서 자신도 상처입는 꼬인 성격이지만 읽을때는 이런 성격이 매력있더라고요. 자존심 때문에 다시 나타나라는 한마디를 못해서,  얼굴을 보기 위해 차라리 죽어버리는 성격이라니 정말 지랄맞기 짝이없는 완벽한 것 아니겠어요? 그래도 어쩐지 그 성격은 다니엘의 불우한 어린시절에서 기인한 것 같아, 레이븐이 저 뒤틀린 성격을 다 받아주는 것도 욕먹어가며 돈지랄을 퍼붓는것도 전부 흡족하게 만들지요. 다니엘이 없으면 잠을 못자는 레이븐은 마왕이라기엔 지나치게 사랑스럽기도 합니다. 다니엘이 씨발씨발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차마 그를 깨우지 못해 불편한 자세를 고수하는것도 귀엽고요. 외전이 조금 더 길었더라면 좋았을텐데. 그 점이 유일하게 아쉽습니다.



.


씨발, 목말라 죽겠네. 먼저 일어나 죽어가는 자신을 씻기고 물도 먹이고 시중을 들지는 못할망정 혼자 단잠을 자다니, 여하간 매너라고는 먹고 죽으려도 없는 악마새끼다. 역시 쏴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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