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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

SAMK, 유통기한

wgmg 2018. 4. 29. 07:00

유통기한(2012)
★★★★☆
채민호 × 이서인



아웃팅당한 게이가 얼마나 삶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대학시절 학내 커뮤니티를 통해 퍼진 소문때문에 이서인은 친구를 잃고 간신히 취업한 대기업에서 잘리고 작은 건축사무소에서 설계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없이 가볍지만 설계만은 천재적인 소장이 만나는 사람마다 이서인이 게이라는 말을 뿌리는 판에 그의 성정체성을 모르는 이는 업계에 없습니다. 짜증나지만 월급은 받아야겠고, 소시민 이서인은 별다른 내색없이 현실을 살아갑니다. 주위 남자들이 그를 불편해하면 한마디 해주면 됩니다. 나보다 잘생긴 사람이 이상형이라고요. 그러면 혹시나 넘겨짚었던 상대는 나는 아니겠구나 납득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는 연을 끊고 살지만 부모에게 물려받은 잘난 얼굴이 이럴땐 도움이 됩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냉랭하고 차갑다고 평가받는 그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가 하나쯤은 있습니다. 벌써 1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가 첫사랑과 헤어진지도.


대학시절 일년간 권기태와 연애했던 이서인은 종종 애인의 친구들과 어울리곤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린 나이에 벌써 작곡가로 유명세를 떨치는 박무영에게는 조금 질투가 납니다. 권기태와 박무영이 무척 친한 사이라서, 이서인은 박무영의 고등학생인 애인과도 종종 만나곤 했습니다. 낯가림인지 유독 과묵한 야구부 에이스 채민호는 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오로지 박무영만 바라보고 눈을 빛냅니다. 권기태가 이서인에게 얼마나 잘하는지, 주위 모든 사람이 그들의 관계를 신기해 하지요. 이서인 또한 부족할 것 하나없이 잘난 권기태가 그의 애인이라는 것에 마음이 떨립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일은 좀처럼 없지만 이서인은 권기태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꿈에도 의심한적 없던 그가 박무영과 침대에서 뒹구는걸 직접 목격했을 때의 충격은 말할 필요도 없을거에요. 황망함에 뒤돌아선 이서인과 달리 함께 있던 채민호는 침착하게 가방에 있던 야구방망이를 꺼내 권기태를 두드려 팹니다. 이서인은 그대로 산골에 처박혀 막노동으로 몸을 혹사하지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마음은 괴롭지만 한편으로 이서인은 자신이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군대가기 전날까지 내내 막노동을 하던 이서인에게 두 명의 사람이 찾아옵니다. 박무영은 권기태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사라지지요. 채민호는 이서인이 아니라 박무영을 보러왔습니다. 그렇게 배신당하고도 아직도 그가 좋다는 채민호에게 이서인은 아무말도 할 수 없습니다. 실은 그에게도 권기태가 아직 마음에 남아있거든요.




***



“안 보면, 시간이 지나면 좋아하는 마음도 전부 사라지겠지.”
이번엔 끄덕임 대신 질문이 들렸다. 얼마나 걸릴까요? 라고. 글쎄.
“길어봤자…… 10년.”


***




그렇게 더럽게 끝난 인연들로부터 십년이나 지난 어느날. 이서인은 소장님에게 골프선수 채민호가 빌딩건축을 의뢰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습니다. 십년만에 재회한 채민호는 쑥쓰러움 타던 아이에서 속내를 비치지 않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어린 시절의 그의 모습이 남아있어서, 이서인은 간질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지요. 채민호를 만나자 자연스럽게 다른 과거의 인물들이 줄줄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순식간에 이서인의 현실로 고개를 내밉니다. 이미 끝난 줄 알았던 인연에서 이서인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에야말로 관계를 정리하고 감정을 털어내야 합니다. 네 사람은 그때 그대로일까요? 혹은, 아주 많이 달라졌을까요.


채민호는 권기태를 때려잡은 보복으로 야구판에서 영영 추방당했습니다. 박무영에게 밟힌 몸도 야구를 할 수 있을 상태가 아니에요. 한때 그의 전부였던 야구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보다 박무영에게 배신당한 상처가 더 큽니다.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뜻밖에 그를 잡아줍니다. 외숙부를 따라 미국으로 떠나면서도 채민호는 종종 그 사람을 생각합니다. 박무영을 완전히 털어내는데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어요. 그래도 그는 10년을 꾹꾹 채우고서야 그 사람앞에 나타납니다. 아무것도 없는 운동부가 아닌 성공한 골퍼로요. 그의 귀국과 함께 십년 전의 사람들이 데자뷔처럼 다시 나타납니다. 채민호는 자신만이 이 관계를 끝낼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은 10년전 그 시간을 버려두었지만, 그는 모든 감정을 털어내고 정리했으니까요. 원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그는 모든 준비를 다 마쳤습니다. 끈기는 그의 장점입니다. 채민호는 그가 가질 것을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이번에도 도와주세요. 형이 절 잡아주세요.


***



형이 더 귀엽습니다. 저도 당장.
머리를 쓰다듬고 싶을 만큼.


***




샴크님 작품에서 주인공이건 주인수건 성장기가 없는 작품은 드물죠. 유통기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진통을 겪어가며 성장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요. 네 사람이 각자에게 품은 감정은 단순하지 않지요. 이서인이 박무영에게 느끼는 열등감이라거나, 박무영이 이서인에게 가지는 열패감 같은건 기묘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각자가 원하는것을 서로 쥐고 있기 때문에 그 둘 중 누구도 우월감을 가지지 못합니다. 반면에 권기태는 아무도 자신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 감정들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채민호는 그 틈을 교묘히 파고듭니다. 사실 그가 뭘 어쩌지 않더라도 권기태는 알아서 자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이서인에게 진심이었다는게 저는 좀 뜻밖이었거든요. 물론 어떻든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만.


이서인은 어른의 연애를 합니다. 한 발 물러나기도 하고 계산서를 따져보기도 합니다. 답답하게 여기는 분들도 있을거예요. 그럼에도 이서인은 중요한걸 놓치지 않아요. 박무영이 그를 들쑤셔놓아도 그는 채민호를 선택하지요. 과거의 이서인은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어른이 된 이서인은 속상한 마음쯤이야 대수롭잖게 숨기고 채민호의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채민호는 정반대입니다. 그는 한가지만을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그에게 물러나거나 계산서를 따지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원하는 것 하나만 손에 쥐면 되거든요. 그의 이런 성격은 이서인을 좀 더 편하게 해줍니다. 그가 물러날 길을 차단하면 되니까요.


유통기한이 복잡한 내용이라거나 대단한 반전이 있는건 아닙니다. 하지만 작가님이 구성을 많이 신경쓴 작품이죠. 초반에 별 의미없어 보였던 내용이나 캐릭터들도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지요. 대충 넣어둔 설정 따위는 없습니다. 읽으면서 정말 감탄했어요. 특히 마지막에서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거기서 그렇게 마무리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마지막 부분은 포스팅에 적지 않았습니다. 읽으실 분들은 아무런 정보 없이 보시면 좋겠어요.




***



싫으면 지금 알려주세요.


***



“호텔 뭐, 괜찮지.”
“갈까요?”
진지하게 되묻는 음성이 맞받아치는 농담일까? 하지만 아닐지도 몰라 소심하게 되물었다.
“…… 밥 먹으러?”
민호는 골목을 벗어나 차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차를 세우곤 날 힐끗 봤다.
“아뇨. 섹스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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